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수 불자설 (문단 편집) == [[법화경]]과 신약[[성경|성서]]의 경우 == 민희식 박사는 1986년 불일(佛日)출판사를 통해 ≪[[법화경]]과 신약[[성경|성서]]≫를 출판하였다.[* 이후 저자는 같은 제목으로 2007년 블루리본 출판사에서 책을 재판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번 서로 다른 출판사를 통해 책을 재판하거나, 증보판을 발행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의 생애와 성립과정의 의문점에 대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에서 나온 설을 소개하였다. [[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53|2007년 금강신문의 책 광고 기사]] 책 광고문구에 '[[불교]]계의 저명한 석학' 운운하는데, 민희식 박사는 불교 전공이 아니다. 실제로 민 박사가 쓴 책을 보면, 이게 정말 오랜 연구 끝에 나왔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상당수 보인다. 특히 후기 [[대승 불교]]에서 성립된 [[밀교(불교)|밀교]]라든가. 왜 연구성과라는 것이 이러한가. 민희식 박사는 [[프랑스어]]를 전공했을 뿐 [[역사]]나 [[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구(?)내용 대부분이 자신이 무언가 발굴하거나 자료를 찾아 고찰하여 쓴 것이 아니라, 서양(특히 [[프랑스]])에서 떠돌던 잡설들을 취합해 번역한 것이라 딱 유사역사학 음모론 수준이다. 참고로 이 사람이 퍼뜨린 것 중에는 [[예수]] 불자설뿐만 아니라 [[십계명]]의 원조라는 아케나톤 18계명도 있다. 아케나톤 18계명은 20세기 [[뉴에이지]] 단체에서 주장하며 내놓은 것인데, 그 내용을 우리말로 번역하고서는 고대 [[이집트]]의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는 [[http://kwangmin.blogspot.com/2012/08/18-18-1-2.html|참고]] 아무튼, ≪[[법화경]]과 신약[[성경|성서]]≫은 이렇게 주장한다. 신약외경 [[토마스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을 114개 항목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의 내용 중 많은 부분이 [[불교]] [[법화경]]의 내용과 유사하다. [[예수]]가 인도에 유학하여 [[불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활동을 알 수 없는 공백기가 있는데, 법화경과 비교함으로써 그 기간에 대한 의문, [[성경]]과 [[불경]]의 일부 유사점 및 [[그리스도교]] 사랑의 정신이 나오게 된 배경 등을 설명한다고 책 스스로는 적는데, 실상 본문 내용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1. [[법화경]]과 [[복음서]] 중 비슷한 부분을 각각 인용한다. 2. 둘이 내용이 비슷한데, [[법화경]]이 [[복음서]]보다 더 오래되었다. 3. 이건 틀림없이 [[Q 문서]]([[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자료로 추정하는 가상문서)이 [[법화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 논리를 보면 왜 신약성경학계에서 별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애당초 [[Q 문서]] 가설로 설명되지 않는 이문현상이 있어 [[복음서]]의 편집사적 측면에서 이론도 나온다. 그런데 다짜고짜 [[Q 문서]]를 사실로 간주한 뒤 다른 근거도 제대로 대지 않고 그저 '비슷하니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니 다른 학자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피자]]는 [[빈대떡]]의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왜냐하면 [[피자]]는 [[빈대떡]]과 비슷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고 주장하는 꼴이다. 진위에 대해서는 [[http://kwangmin.blogspot.kr/2011/11/vs_18.html|링크1]] 및 [[http://kwangmin.blogspot.kr/2011/08/blog-post_5980.html|링크2]]에서 참고. 아무튼, 책이 주장하는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인도 북서부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침략]]하여 약 2백 년간 지배([[인도-그리스 왕국]])하였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메난드로스 왕의 시대에 샤카라(현재 시아르코트)를 중심으로 동서 간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인도 북서부에 당시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주하여 도시를 건설하는 등 [[그리스]] 문화가 크게 번성하여 간다라 문화를 이룩하였다.[* 일단 여기까지는 입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는 이렇게 간다라 문화가 번성한 시기에 서방의 지혜를 구하려 유대의 제사에 참석하였는데, 남인도 오릿사 주의 왕족 라반나가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인도 유학을 권유했다. 그래서 [[예수]]는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서 4년간(20~30세) [[승려]]로 지냈다. 그러나 힌두교와 바라문교를 연구하여 브라만의 [[카스트 제도|계급제도]]의 부당함을 비판하다가 목숨의 위협을 받자 [[티베트]]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성인 '맹그스테(Meng-ste, [[맹자]])'의 지도하에 [[불경]], [[요가]], 영계의 빛을 받아 병자를 치료하는 심령술에 관한 비법, 예배방법을 배워(23~24세) 기적을 행하였다!!! (기원후 사람인 예수를 기원전 유학자인 맹자가!!) 그 후 [[페르시아]]의 도읍지 페르세폴리스로 가서 24년 전 자신이 태어났을 때 찾아온 [[동방박사]] 3명을 만나 [[조로아스터교]] 선악이원론을 [[불교]]에서 깨달은 진리를 바탕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확고히 하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철저한 이원론은 [[불교]] 철학의 관점에서는 타파대상 제1순위를 오르내린다. 말이 좋아 저 둘을 비판하고 토론했다고 표현하지,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내용은 아래에서 설명할 ≪보병궁복음서≫에서 따왔다. 사실 이 설은 비판의 여지가 너무 많다. [[예수]]의 기본성격은 '학자'나 '구도자'가 아니라 사회비판적인 목청을 높이는 '''[[예수의 성전 정화#s-4|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이다.[* 이건 단순히 인상비평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저명한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참고로 그 예언자로서의 활동이 (당연하게도) 유대교 예언자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도 학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논리와 사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오로]]의 스타일이지 [[예수]]의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예수]]를 학자/구도자와 같은 개념으로 잡음 자체가 초점이 어긋난다. ~~어록을 봐도 4대 성인 중에 유독 대놓고 들이받는 패턴이 많다.~~ 게다가 시골 깡촌인 나자렛[* 성경에 대놓고 나온다(...) 물론 깡촌이라고 써있지는 않지만,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나사렛 출신이 뭐 별거 있겠냐'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처음 만난 [[사도 필리포스|필립보]]가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 분을 만났다"고 호들갑을 떨자 그 말을 들은 그의 친구 [[사도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뚱하게 반문한다.]에서 목수, 정확히는 건축 관련 잡다한 일을 두루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해외를 두루 다니며 갖가지 사상을 배우고 돌아왔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 시절에 여행이란 극히 위험하여, 돈이며 그 밖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다.[* 이 당시엔 외국의 지리와 환경에 대한 지식을 보통사람들은 모르는게 일반적이었고, 외국으로 간다면 무역상들과 합류해서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육지가 아닌 바닷길을 통하기엔 당시의 항해술이나 배가 지금처럼 좋지도 않아 역시 위험했다. 게다가 외국으로 갔다가, 혹은 거쳐가는 나라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도 모를 일이엇다. 당장 이때로부터 수백년후에 일어난 일중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가던중 [[고구려]]를 거쳐서 간일이 있었는데 둘이 함께 고구려에서 순찰대에 붙잡혀서 스파이로 몰려 심문을 받으며 고초를 겪다가 풀려난 일도 있었다. 이 당시 당나라와 고구려, [[신라]]의 관계는 예수가 살아있었을 당시의 이스라엘과 인도의 관계보다 가까웠음에도 이 정도였다. 게다가 이때로부터 1000년 이상 지난후 생긴 일들을 보면 [[임진왜란]]때 한반도의 겨울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왜군들이 겨울에 저체온증이나 얼어죽는 일도 많았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당시에도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프랑스군들이 상당수가 저체온증이나 얼어죽었다. 무려 예수가 살아있던 시절로부터 1000년이 넘게 지난 후인데도, 심지어 인근 국가인데도 인근 국가의 환경에 대비를 못해서 사망한 일이 많았는데 예수가 살아있었을땐 어땟을진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의 양아버지 [[나자렛의 요셉]]이 돈이 많거나 권력 좀 있는 제사장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깡촌의 목수 아들이 페르시아 건너 인도까지 유학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요셉은 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어릴 때 이미 사망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이 "우리가 밥그릇 숫자까지 아는 [[나자렛의 요셉|요셉]] 아저씨, [[성모 마리아|마리아]] 아줌마네 아들이잖아?"라는 식으로 대했다는 점도, [[예수]]가 나자렛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살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계의 이론을 너무 무시한 주장이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를 "요셉 아저씨, 마리아 아줌마네 아들이잖아?" 하며 무시했다는 일화(마태 13:53-58, 마르 6:1-6상, 루가 4:16-30)를 복음사가들이 기록하며 부담을 느꼈을 정도라, [[역사적 예수]] 연구자들은 이 일화가 역사적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거기에 굳이 예수의 유년시절을 기록하지 않은것 역시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로도 충분히 반론이 가능하다. 당장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소개할때 유년시절까지 세세하게 소개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저 간단하게 누구의 아들인지 또는 뭐하다가 선지자가 된것인지에 대한 경위만 적혀있을뿐이다. 예수의 유년시절 기록이 없는 것도 단지 다른 선지자들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적을필요가 없어서 생략한것에 불과하다. 단지 예수는 다른 선지자와 달리 [[메시아|무게감]] 이 달랐을 뿐이다. ] 또 다른 문제점은 예수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티베트에 불교가 제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왕 때의 일로 예수 활동 시기와 500년 이상 차이가 있다. 물론 티베트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불교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수십년 전이라면 몰라도 500년 이상 전에 불교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일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예수 생시에 티베트에 불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수지역에 한정되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세력도 크지 않았을 것인데 멀리서 온 낯선 이방인인 예수를 가르칠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구약시대 때 호전적이었던 [[야훼|하느님]]이 신약시대에 와서 '사랑과 구원의 신'이 된 성격변화도 생각할 가치가 있다. 구약성경은 오랜 시간에 걸쳐 쓰였는데, 구약 중 후기에 씐 문서에서는 이미 [[유대인]]들의 민족신/국가신의 성격이 많이 흐려졌다. 대표적인 것이 [[요나]]서. [[야훼]]가 [[유대인]]들의 원수인 아시리아인의 생명 또한 귀하게 여긴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유대교 역시도 '유대교 믿으면 유대인'이라는 논리라서, 막연히 혈통에 의한 구원만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또한 [[유대교]]에서는 랍비들이 쓴 [[성경]] 주해서(미드라쉬), 주해서의 주해서, [[성경]]의 모음을 일부러 다르게 읽은 신비주의적 해석, 묵시록 등 여러 종교문서의 성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이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위대한 랍비로 칭송받는 힐렐이 [[그리스]] 논리학을 들여왔을 정도로 헬레니즘의 세례를 잔뜩 받았고, 지식인들이 [[히브리어]]로 글을 쓰기보다 [[그리스어]]로 글을 쓰기 편안해 할 정도여서, 단지 민족/국가의 수호신이란 성격이 더욱 흐려진다. [[예수]]가 주요 거점으로 삼았던 갈릴래아는 유대 왕국 내에서 반골 기질이 심하고,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촌구석이란 말을 들었다. 사회개혁적인 [[예수]]의 외침이 왜 갈릴래아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토마스 복음서]] 또한 [[영지주의]]적 관점이 많이 드러난 문서이고,[* 이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는 토마스 복음서 자체를 정경은커녕 외경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외 주장도 아직까지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확연한 근거가 없다. 아직까지 [[신학]]계에서는 논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설임을 명심하자. 또한 애초에 신약성경 자체도 반박의 증거로 충분하다. 신약은 종교적인 내용은 있을지언정 예수 사후 비교적 빠른 시기에 문서가 집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약 어디를 찾아봐도 예수의 경력으로 외국 유학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예수가 당시 로마의 주적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다녀왔다면, 안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이를 갈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다. 종교적으로 반박하기도 쉬워질 뿐더러, 정치적으로 누명 씌우기도 좋다. 하지만 예수의 처형을 주장할 때도 "이놈이 민중을 선동합니다." 정도만 언급될 뿐이다. '선동'이라고 누명을 씌웠으면서, 그 사람이 이교도 국가에 갔다온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니 말이나 될까? [* 마태 26:59-61, 마르14:55-59 등을 보면, 예수를 잡아온 후 대사제 가야바와 온 의회가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할 만한 증언을 눈에 불을 켜고 찾지만 결국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발언을 했다.' 정도 증언만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요한복음 10:19절에서 42절 까지를 보면 예수가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삼위일체|"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위해 돌을 집어던지고 예수가 그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일화나 [[스테파노]]의 최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율법을 근거로 [[사적제재]]를 가하는 것은 로마에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또한 예수불자설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예수가 법화경이나 불경을 인용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조금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주장인지 알수가 있다. 당장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에 있었던 [[광야의 유혹]]에서 보더라도 예수는 신명기 구절을 인용하여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고 이후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과의 논쟁에서도 구약성경속 구절들을 인용해가며 그들의 주장을 논파했고 [* 복음서에서 바리사이가 예수에게 워낙 쉽게 논파당하기에 이들이 [[자코]]처럼 보이겠지만, 이들의 후신인 [[하레디]]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밥 먹고 숨쉬는 것만 빼고는 하루종일 성경공부만 하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예수에게 자주 논파당한다고 나옴은 바리사이가 약해서가 아니라 예수가 그만큼 위대하고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묘사였다.][* 이외에도 [[니고데모]]나 [[아리마태아의 요셉]]처럼 예수를 따르는 바라사이들도 나오는데, 이들이 산헤드린 공회에 참석이 가능한 고위직 바리사이들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밑에 예수를 따르는 바리사이들도 적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예수 불자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말마따나 예수가 주구장창 불경이나 외우고 다녔다면 그들이 예수를 따랐을까? 오히려 돌에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예수가 구약성경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알고 적시적소에 이를 인용하였기에 그들도 '틀린 말은 아닌데?'하고 따른 것이다.] 또한 예수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할 때도 구약성경 속 구절이나 일화를 자주 인용하였다.[* [[신약성경의 구약성경 인용|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말에 조그맣게 주석이 달린 부분이 있는데, 이는 예수가 구약성경의 어느구절을 인용하였는지를 설명해주기 위해 달아둔 주석들이다.]]][* 신약이 구약을 인용한것에 대해 민희식 박사도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였는지 자신의 저서에서 구약은 고대 수메르 신화와 바빌로니아 신화를 섞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 이 주장을 논박할 가장 확실한 사실은 [[법화경]]의 성립시기가 결코 신약성경보다 빠르지 않다는 것. '''[[법화경]]은 서기 200년경의 문헌'''이다.[* 데미언 키온(Damien Keown), [[https://ridibooks.com/books/3945000158?_s=search&_q=불교&_rdt_sid=search&_rdt_idx=0|"불교"]]] 반면 신약성경은 서기 100년 전후로 책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가장 빠른 것은 바오로 서간인데 '테살로니카 1서'가 서기 51년 무렵, 가장 늦은 사목서간조차 2세기 초쯤에 쓰였다. [[복음서]] 중 [[마르코 복음서]]는 서기 70년쯤에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약 [[Q 문서]]가 실존했다면 [[마르코 복음서]]보다 더 이를 것이다. [[Q 문서]]가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Q 문서]]가 성립된 시기를 서기 50~60년으로 보기 때문. 또 [[토마스 복음서]]를 중시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토마스 복음서]]는 [[Q 사본]]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는데, 그렇다면 당연히 [[Q 사본]]이나 [[토마스 복음서]]나 [[법화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차라리 예수가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인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왔다고 하는게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